저문 날의 삽화 1

2021. 6. 7. 19:27소소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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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문 날의 삽화 1

 

박완서 선생의 소설 <저문 날의 삽화>를 참 재미있게 읽었다. 누구에게나 인생에 있어서 저문 날의 삽화는 있을 것이다.

 

이제 50이 넘었다. 요즘은 저녁노을이 질 때면, 이미 저물어버린 내 젊은 날의 삽화를 추억하곤 한다.

 

나의 저문 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나와 친구들은 서둘러 술과 담배를 배웠다. 성인의 악습을 뭐 그리 급하다고 그렇게 일찍 배웠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만 나온다. 성인이 되려면 술과 담배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물론이고 나의 친구들 중에 불행(?)하게도 악덕 지주나 선주의 아들은 없었다. 그래서 호주머니 사정이 특별히 나은 녀석이 없었다. 우리는 늘 가난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우리들의 사정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대부분 상급학교로 진학을 했지만, 그 무슨 필수인 양 재수를 하는 녀석도 있었다. 진학을 했건, 재수를 하고 있건 간에 꼴에 성인이라고 당당하게 담배를 피워 물었고, 주말에 만나 인생이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지껄여댔다. 지금은 웃고 넘길 수 있는 일을 그 때는 꽤나 진지하게 침 튀겨 가며 목청을 높였다.

 

참 빨리도 지나갔다. 내 젊은 날...

 

그 때 자주 가던 곳이 부림시장 통에 있던 '양산박'이었다. 주머니 사정이 뻔한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니, 여기라도 가서 마시는 게 그나마 그 당시로서는 호사였다. 호주머니 사정이 더 나쁠 때는 술을 사 들고, 바닷가로 가서 찬 밤바람 맞아가면서, 담배를 안주 삼아 마셔야 했으니까.

 

양산박은 항상 시끄러웠다. 지금은 민주화니 데모니 하는 이야기를 잘 하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화두는 민주화나 데모 같은 사회 참여적인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NL이고 PD고 간에 열띤 토론을 했고, 설익은 자기 주장을 이야기하다 고성이 오고 가는 건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열띤 토론을 하다가 어쩔 때는 술잔이 날아가기도 했다. 또 담배를 꼬나 물던 당찬 아가씨와 실랑이를 벌이던 어줍잖은 남성우월주의자도 자주 목도되곤 했다. 여기다가 여기 저기서 경쟁이라도 하듯 목청껏 민중가요를 불러 제꼈으니 양산박이 조용한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었다.

 

파전에 막걸리나 소주를 아껴 마시면서, 그나마 있던 안주가 떨어지면 기본()안주(일명 찌께다시)로 나오던 희멀건 깍뚜기와 콩자반으로 술을 마셔야 했다. 이마저도 모자라 술 한 잔에 깍뚜기 하나, 또는 콩자반 하나만 먹어야 했다. 술은 고프고 돈은 딸랑딸랑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어떤 기차역도 내 젊음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러다 돈 있는 선배나 조금 풍성한 안주로 먹던 옆 자리 사람들과 우연히라도 어울리게 되면 재수에 진배없었다. 입맛만 다시던 안주를 먹을 수 있었으니 오죽했으랴.

 

그때 자주 불렀던 노래가 '직녀에게',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등이었다. 술로 불콰해진 얼굴로 참 열심히도 불러 제쳤었다.

 

이제 이런 술집도 술자리도 보기 힘들다. 아니 볼 수가 없다. 사라진 지 오래되었으니...

 

그 동안 술 문화가 많이 변모했고, 우리들도 그 당시를 추억하며, 이제는 안주 걱정하지 않고 술을 마실 수 있을 정도의 돈은 가지고 다니는 나이가 되었다.

 

이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정겨운 추억을 함께한 친구들이 아직 내 곁에 있어 행복하다. 내 젊은 날, 첫 번째 저문 날의 삽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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